루마니아 정교회와 유럽 카톨릭의 관계
페이지 정보
본문
루마니아의 종교는 동유럽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어
정길선 칼럼니스트

▲ 필자/정길선 박사 ©브레이크뉴스
루마니아로 보면 그 대표 종교가 정교일 뿐이지 정교가 국교는 아니다.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로 손꼽히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문화도 다른만큼 같은 기독교라 할지라도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의 민족과 종교는 그 복잡한 역사와도 땔레야 땔 수 없는 관계다. 루마니아는 고대 시대부터 아시아와 유럽, 발칸과 유럽, 우랄-아시아와 발칸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종교적으로는 로마 카톨릭과 비잔틴 정교회의 경계 역할을 했었던 곳이고,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와 같은 라틴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카톨릭화가 되지 않았던 것은 비잔틴과 슬라브 민족의 영향을 막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다고 현 루마니아 땅이 처음부터 기독교도들의 땅이 된 것이 아니다. 보래 루마니아는 그 정체성이 모호한 국가였다. 고대에는 로마 제국과 슬라브족, 게르만 계통의 민족 및 고트족과의 경계를 이루었던 곳이었고 슬라브족, 게르만 계통의 민족 및 고트족들이 들어오면서 그들만의 문화와 종교적 영향을 받아 샤머니즘이 성행했다.
고대 다키아 왕국은 루마니아 역사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에게 정복되어 다키아 속주가 설립이 되어 로마인들이 다키아 속주에 집단거주, 다키아 원주민 및 슬라브-게르만-고트족 이주 집단과의 집단 혼혈을 통해 오늘날 루마니아인의 토대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아시아계의 스키타이-켈트-사르마트인들도 들어오면서 정체성이 모호한 혼혈집단이 되었고 이들은 로마 시민권을 얻었지만 정통 로마인이라 부르기 어려운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당시 로마어 (고대 라틴어)를 쓰고 읽으며 말하는 로마인이었지만 워낙 다양하고 다채로운 집단과 혼혈을 통해 이방인들의 언어군들이 로마어와 섞여 고중세 루마니아어의 기초가 형성된다. 이후, 계속 변형을 겪어 오늘날의 현대 루마니아어가 된다. 이 정체성 모호한 오늘날 루마니아 땅에 자리 잡은 집단들은 375년부터 시작된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최대 희생양이 된다. 게르만족과 고트족이 루마니아에 들어오고 훈족이 따라 들어오면서 이들 사이에 루마니아는 치열한 격전장이 된다.
이후 아시아계 유목민족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땅으로 인식된 루마니아는 북부 트란실바니아가 아바르족에게 정복되었고, 이후 마자르족이 침공해 헝가리 역사의 기초가 되는 마자르 왕국의 영토가 된다. 이 때 마자르족, 헝가리 제국을 건국하는 이슈트반 1세가 교황에게 헝가리 왕의 왕관을 받고 정식으로 로마 카톨릭 국가가 된다. 이 때 트란실바니아는 카톨릭 국가가 되었지만 도나우 강 일대의 도브루자와 왈라키아, 도나우 강 남부 지역의 루마니아 땅은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아 비잔틴 정교회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 된다. 게다가 해당 지역은 불가리아 제국의 영향까지 받았기에 당시 정교가 인구의 대부분이었던 불가리아는 루마니아 남부 지역 일대에도 정교회가 뿌리를 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루마니아의 정교회는 이런 기초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렇게 되자 루마니아는 중세 시대부터 카톨릭과 정교가 격돌하는 땅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로마 카톨릭이 아닌 동방 카톨릭이 들어오고 독일인 들이 유입되어 이들이 믿고 있는 루터교 프로테스탄트까지 들어오면서 루마니아는 기독교 종교전쟁의 대표적인 피해국가가 되었다.
도브루자 지역과 루마니아 남부 도나우 일대의 정교인들은 조직적으로 강대국인 헝가리와 로마 카톨릭에 저항했다. 이는 오스만투르크가 비잔틴 제국과 불가리아, 세르비아 왕국을 정복하고 북진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결국 루마니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되어 가뜩이나 골치 아픈 기독교 간의 분쟁에 이슬람까지 들어와 합류하게 되었다. 더불어 오스만과 헝가리의 최전선이기도 했고, 이슬람 국가와 기독교 국가의 최전선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혼란은 격화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루마니아인들의 정교 예배나 관습을 존중했다. 이들을 굳이 무슬림으로 개종시키지 않았으며 일정 부분 세금을 내면 정교든, 카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뭐든 인정해주었기에 당시 루마니아인들은 오스만에 대한 적대감보다는 같은 기독교이지만, 카톨릭 국가인 헝가리를 더 싫어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민족적 감정으로 볼 때 서로 간에 적대하는 적대국이다. 대표적인 예로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인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붙어 헝가리 혁명 진압에 앞장섰고 헝가리인과 루마니아인은 트란실바니아에서 서로를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상당수의 민간인들을 포함 약 4만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1848년 혁명 와중의 인종 청소로 인해 살해되었다.
헝가리에서 발생한 혁명을 제압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헝가리를 각 지역별로 분할하여 탄압했고 루마니아인들은 오스트리아를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1867년, 대타협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 설립되면서 주권을 되찾은 헝가리인들이 급진적인 마자르화 정책을 실시했다. 이들은 카톨릭으로 정교인 루마니아인들을 극단적으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이에 헝가리인과 루마니아인의 갈등은 극에 달했으며 루마니아 전역은 이들의 내전으로 황폐화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루마니아 왕국은 카를 1세의 독단으로 인해 비밀리에 독일,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했지만 헝가리도 이들에게 가담했었기 때문에 둘의 불화는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대다수 루마니아인들은 친프랑스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헝가리는 이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916년 루마니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배신하고 연합국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편으로 갈아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함에 따라 트리아농 조약으로 트란실바니아를 루마니아가 온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헝가리 입장에서 트란실바니아는 수백여년 간 수많은 헝가리인, 세케이인이 거주해오던 전통적인 영토였기에 포기하기 어려웠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다시 나치 독일 편이 된 헝가리가 트란실바니아를 탈환했지만 독일이 패전하면서 트란실바니아는 다시 루마니아로 귀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루마니아계 헝가리인이나 헝가리계 루마니아인들 모두 루마니아에서 약간씩의 차별은 있지만 두 국가 모두 현재 EU 국가이자 나토에 속해 있기에 그 차별성은 많이 완화된 편이다. 특히 종교적으로 볼 때, 루마니아는 인구의 84% 이상이 기독교 신자라 볼 수 있는데 이 중에서 루마니아 정교회가 73.6%을 차지하고 있다. 루마니아의 동방 카톨릭은 종교의 자유화 이후 교황청의 지원을 받아 권리를 되찾았다. 그리고 공산정권 시절에 루마니아 정교회에 침탈당한 교회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루마니아 정교회가 이를 거부했다. 이로써 양측간에 대립이 심해져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은 헝가리계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동방 카톨릭과 달리 루마니아 정교와는 비교적 잘 지내고 있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양국간의 사이는 매우 악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루마니아에서는 대 러시아 제재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에 대해 엄청난 비판을 가하고 있다. 2022년 5월 4일에는 루마니아 대법원이 빅토르 오르반과의 불법 커넥션이 있다는 이유로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계 가톨릭 학교를 폐교하라는 루마니아 정부의 명령을 승인했다. 그러자 헝가리에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며 반발했다. 그리고 최근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와 카르파티아 북부 지역의 고토(古土)를 회복하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인 일례가 트란실바니아를 방문한 노바크 커털린 대통령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등정하여 헝가리 삼색국기가 칠해진 바위와 함께 인증사진을 찍은 사건이다. 이 지역들은 모두 헝가리인들이 되찾고 싶어하는 숙원의 땅이다. 루마니아는 이를 헝가리에 강력히 항의했다. 2025년 1월 1일, 루마니아가 쉥겐 협정에 가입하면서 헝가리인의 트란실바니아 월경이 편리해지긴 했지만 루마니아는 헝가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입장이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출처: (주)브레이크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