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지역 세입자의 죽음으로 본 루마니아 현실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 콘티넨탈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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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퇴거를 거부하고 버티는 고약한 세입자를 내보내기 위해 헌병들과 함께 출동한 그는 나름대로 대화로 설득하고 사정을 봐주며 원만한 해결을 기대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주인공은 도덕적 비난에 봉착하며 고뇌에 빠진다.
도덕적 가책에 빠진 성실한 공무원의 고뇌

영화의 도입부는 당혹스럽다. 시작된 다음 한참 동안 문제의 세입자가 생계를 위해 일용직 날품필이 노동을 수행한다. 쇠락한 공원 유원지에서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이다. 일 중간중간에 그는 볼썽사납게 거리 곳곳에서 잔돈푼을 구걸한다. 카메라는 일체의 개입이나 해설 없이 관찰하듯 남자의 행보를 조명한다.
세입자인 중년 남성은 불만에 가득 차 욕설을 입에 달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행태로 일관한다. 가게마다 그가 손님들에게 추근대지 못하도록 내쫓느라 애가 탄다. 그렇게 피곤한 하루가 저물고 남자는 낡은 건물의 보일러실 같은 허름한 구석에 몸을 누인다. 종일 공원 곳곳에 유기된 쓰레기를 줍는 대가는 한 끼분 급식에 불과하다. 물은 공원에서 길어와 해결한다. 그렇게 추위를 견딘 다음 날, 그는 주인공 일행의 방문에 실랑이를 벌이던 중 사건에 이른 것이다.
주인공은 동료와 가족들에게 고충을 토로하지만, 일단 법적으론 아무 문제가 없다. 퇴거 집행을 위해 여러 번 통보도 했고, 유예기간도 제법 줬기 때문이다. 노련한 집행관답게 쉼터 알선도 제안했고, 짐을 옮길 승합차도 대여했다. 워낙 이런 충돌이 빈번한 터라 강압이나 물리력을 함부로 행사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위해 사진 채록도 늘 꼼꼼하다. 검사나 집행관 부서에선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며, 제도적으론 합법이고 문제될 행위를 저지른 것 없으니 안심하라 말하지만, 법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일하던 주인공은 오히려 그런 안전함이 더 불편하다.
물론 법적 문책을 면한 건 내심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그가 목격한 상황은 도덕적 가책과 자신의 업무에 관한 회의를 촉발하기엔 차고 넘치는 건이다. 마음이 괴로운 그는 가족들과 예전부터 마음먹고 준비한 해외여행 합류를 미루고, 절친한 친구 & 과거의 제자 & 정교회 신부를 차례로 만나며 자신이 처한 심리적 불안을 토로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대화를 계속한다. 하지만 속 시원한 해답이 쉽게 주어질 리 없다.
부조리한 조국의 현실, 신랄과 허무의 경계에서

라두 주데의 신작은 감독의 작품 중 국내 최초 개봉한 <배드 럭 뱅잉>에 비하면, 비교적 전통적 극영화 형태를 갖췄다. 그의 영화는 루마니아와 유럽, 나아가 근현대 세계가 당면한 무수한 아이러니와 흑역사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거대한 블랙코미디로 일가를 구축해 왔다. 먼저 본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악명(?)이 자자한 근작들을 영화제에서 접해온 이들이라면 이번 신작의 상대적으로 평범한 전개는 외려 실망할 지경이니 감독의 평균치가 어떨지 대강 짐작은 될 법하다.
초반부는 특히 적당한 시사상식 조크 정도만 감독의 작품세계 특유의 인장을 떠올리게 하는 정도로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중반부로 접어들며 점점 이야기는 감독이 일관되게 추구한 주제의식의 장강대해와 합류한다. 그러면 그렇지 하며 짜릿할 이들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곰곰이 되짚어보면 전반부도 제법 독기가 만만하지 않다. '빅 픽쳐'를 사전에 다 설계해두고 차근차근 조립해 나가는 솜씨가 역시 명불허전이다.
공무집행 과정에 발생한 실존적인 위기에 처한 주인공과 연결된 주변 인물들이 순차적으로 등장해 제 몫을 소화한다. 그들은 시답잖은 소리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여도 동유럽 방식의 냉소주의와 세계가 처한 여러 난맥상의 이면을 촌철살인으로 차례차례 관통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중이다. 주인공의 남편은 심각한 도덕적 위기에 봉착한 아내의 불안을 그저 무심하게 농담이나 던지며 넘기자고 한다. 그리스로의 가족 휴가가 해결책이란 단순한 발상이다. 그러나 도무지 속 편히 여행 떠날 형편이 아니다.
오랜 친구를 만났다. 그들의 대화는 직설적으로 유럽이 처한 딜레마를 직격한다. 아니, 평범한 시민의 속물성을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장면이 또 있나 되짚게 만든다. 둘은 커피 한 잔 마실 동안 만담 콤비처럼 오만가지 이야기를 쏟아낸다. 친구네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는 노숙자는 일상의 골칫거리다. 친구는 그를 동정하고 혐오하길 반복하며 자신이 속물이라 한탄한다. 영하 18도 날씨에 노숙자가 얼어 죽을까 걱정하지만, 그가 방뇨하는 배설물 냄새가 추우면 덜 난다며 다행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에겐 다양한 기부로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라 권한다.
대화는 무한 우주처럼 확장된다. 친구는 다양한 단체에 후원하며 뿌듯해 한다. 가자와 우크라이나 난민 지원은 유럽 시민의 기본 소양이다. 우리가 '집시'라 부르는 동유럽 소수민족 '로마' 가족의 빈곤이 사회의 책임이라 분노한다. 여성복지나 빈민구제에도 문자 결제 소액후원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게 수십 군데에 큰 부담 안 가는 선에서 후원을 계속하는 친구는 그야말로 '깨어있는 시민'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옆 노숙자는 불편을 끼치기에 치워버리고픈 존재다. 친구 역시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양심과 편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자선 역시 해결책이 아니었다.
해답을 찾지 못한 주인공은 필사의 탐구를 이어간다. '성스러움'이 다음 동아줄이다. '성'과 '성', 상반된 해법으로 어떻게든 오랫동안 기다려온 여름휴가를 만회하려 애쓴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며칠 동안이 그녀에겐 실존의 위기를 극복할 유예기간인 셈이다. 그렇게 영화 내내 악전고투가 계속된다. 하지만 과연 구원은 가능할까?
사회주의 몰락 이후, 황금만능주의가 장악한 루마니아의 현실

흥미로운 캐릭터가 적지 않지만, 영화의 또 다른 주역은 바로 그들이 살아가는 신도시의 건축물과 거리다. 주인공은 루마니아에서 소수민족인 헝가리계다. 명백히 그녀의 집행 과정이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규정을 준수한 것임에도 사회적 비극에 직면한 미디어와 익명의 네티즌들은 오로지 그녀의 혈통을 트집잡아 온갖 악담을 퍼붓는다. 정작 강제집행을 독촉한 건설자본의 책임은 실종된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아이러니의 출발이자 근원인데 말이다.
영화에 반복 강조되는 대목이 있다. 부동산 개발로 부를 축적한 재벌과 정부당국의 유착으로 동계 퇴거가 용인되는 현실을 개탄하는 주인공과 동료 집행관의 시선을 통해 과거 동유럽 사회주의권에서 시장만능주의로 전환한 현대 루마니아 역사를 되새긴다. 세입자 사건이 발생한 자리엔 고급 부티크 호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건물 이름은 곧 작품의 제목으로 활용된다. 언론이 떠드는 구도, 불운한 루마니아인 체육영웅이 악독한 헝가리계 집행관에게 벼랑 끝에 몰려 비극적 선택을 했다는 분노는 머지않아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테다.
카메라는 주인공이 꾸준히 발걸음을 내디디며 자신의 도덕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여정을 이어가는 와중에 마치 정지하듯 그녀의 동선에 놓인 도시의 건물을 조명한다. 어떤 건물은 웅장한 사회주의 양식의 공공건축을 표상하지만, 인민으로 들끓는 '광장'을 지향한 그런 건물과 거리는 텅 비었거나 낡고 쇠락하는 상태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대사처럼 '중국식 아파트'와 중산층 주택단지, 관광객을 위한 레저 시설이다. 근사하지만 살풍경한 건 매한가지다. 과거 비밀경찰을 비롯한 고위층이 건설 열풍의 중심이다. 이들은 행정당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드리우고, 법은 공평하지 않다. 결국에 사회주의가 꿈꾸던 평등사회 실패 후 극단적 계급 서열이 들어선 것. 왜 굳이 지루할 정도로 빤히 그 건축양식 대비를 강조하는 걸까? 마치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가 일방적 재개발 문제를 폭로하듯 관객에게 주변 풍경을 돌아보라는 메시지 말고는 답을 찾을 수 없다.
현대 유럽을 관통하는 거대한 위기를 근심하는 위악적 모험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대화를 소화하기 위해선 루마니아 역사 개괄, 유럽 지성사 상식, 도시 빈민과 소수자에 대한 관점이 모두 필요하다. 루마니아 내 소수민족 헝가리계 시민들이 받는 차별과 편견, 동유럽 어딜 가나 환영과는 거리가 먼 '로마(집시)'에 대한 시선, 노숙자 인권을 이야기해도 이웃으로 맞기엔 싫은 소시민 감성이 차례로 화두가 된다. 세계는 연결되어 있고, 대화는 선불교 철학 토론에 이어 비인간화 현상 예시로 한국의 산업재해까지 거론한다. 부끄러운 세계화의 '동시성'이다.
유려한 연출 전개와 기동적인 촬영(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스마트폰 숏폼 촬영 형태로 이뤄졌다) 등이 결합해 작품은 마치 과거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즉응성과 현장성을 21세기에 새롭게 시도하듯 보인다. 애초 감독이 로베르토 롯셀리니의 <유로파 51>을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밝힌 바 있으니 두 작품을 비교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 될 테다.
그렇게 영화는 도덕적 당위와 소시민적 안위 사이에서 표류하는 주인공의 초상을 조명하지만, 방법론은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유럽 예술영화의 그것과는 거리감이 큰 궤도를 홀로 공전한다. 주인공이 간절히 원하던 속 시원한 위로의 해답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세상이 직면한 거대한 모순으로 관객을 휘감는다. (작중 수시로 언급된) 브레히트의 상황극과 묘하게 통하는 지점이 많기도 하다. 라두 주데는 자신이 천착해 온 거대한 딜레마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중세 궁정에서 제 목숨 내걸고 군주를 풍자하며 조소를 던지던 광대의 재림처럼 작업을 잇는 중이다.
<작품정보>
콘티넨탈 '25
Kontinental '25
2025 루마니아 드라마, 코미디
2025.11.19. 개봉 108분 15세 관람가
감독 라두 주데
출연 에스테르 톰파, 가브리엘 스파히우, 아도니스 탄차
수입 (재)전주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엠엔엠인터내셔널㈜
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2025 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각본상)
출처: 오마이스타(https://star.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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