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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역사

루마니아의 정치적 변동과 이온 안토네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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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1회 작성일 24-03-1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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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4/03/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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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길선 칼럼니스트   


우크라이나에는 스테판 반데라가 있어 나치에 협력해 유태인들을 학살했지만 루마니아에도 스테판 반데라 못지 않는 자가 있다. 그는 바로 이온 빅토르 안토네스쿠(Ion Victor Antonescu, 1882~1946)이다.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의 피테슈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기에 프랑스로 이주해 파리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사 교육을 받은 후 장교가 되었다.  


안토네스쿠는 이후 귀국하여 1907년에 루마니아 왕국에 대항하여 일어난 농민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13년의 헝가리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고 전후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 간섭에도 참가하여 부다페스트를 함락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파리, 런던 주재 무관을 거쳐 기병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참모 대학 교장을 지내고 사단장 경험을 거쳐 1933년에 루마니아의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루마니아 왕국 군대의 근대화를 실시했다. 

 

그리고 1937년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반(反) 유대주의와 극우주의의 성향을 가졌기에 코르넬리우 코드레아누(Corneliu Codreanu, 1899~1938)와 가까이 지냈다. 코드레아누가 만든 정당은 전위조국당(Totul pentru Tara)으로 그 성향은 파시즘과 유사했다. 그렇게 파시스트가 된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정부로부터 국가 전복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그는 석방되었으며 루마니아 왕국의 카를 2세와 대립한 끝에 1940년 9월 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게 된다.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역사상 최초로 콘두커토르(Conducător)라는 지위를 만들었다. Conducător는 지도자라는 뜻의 루마니아어로 로마 시대 집정관인 Consul (콘술)에서 유래했다. 이 호칭은 차우셰스쿠도 뒤이어 사용했는데 공통점은 두 사람의 최후가 모두 총살형이었다는 점이다. 

 

이후 안토네스쿠는 추축국에 가담하게 되면서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전위조국당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1940년 9월 14일 루마니아는 "국민군단국가(Statul Național Legionar)"임을 선포하였으며 미하이 1세를 루마니아의 국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루마니아의 나치이자 파시즘이라 불리는 전위조국당의 일당 독재가 시작되었다. 이어 그는 독일군의 주둔을 허용함과 동시에 독일과의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여 독일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높이게 된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과의 협력을 위해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상황에 협조했다. 그는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전위조국당과의 사이에서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위조국당 대원들이 루마니아 최고의 역사학자인 니콜라에 이오르가(Nicolae Iorga, 1871~1940) 등 많은 인사들을 암살하는 등 과격화 되면서 통제불능의 상황이 되자 안토네스쿠는 전위조국당에 서서히 두려움을 느끼고 차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에 전위조국당은 1941년 1월 21일 부터 23일까지 무장폭동을 일으켰만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당연히 전위조국당은 해체되었고, 국민군단국가 역시 2월 14일 해체되어, 이온 안토네스쿠는 군부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때 전위조국당을 숙청하고 국민군단국가 해체 및 안토네스쿠의 군부독재 등을 승인했다. 대조국 전쟁 때 독일과 연합하여 소련을 공격하면서 대조국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루마니아 왕국의 군대는 가장 많은 수의 대규모 병력을 동부전선에 파견했지만 루마니아 군이 다른 열강의 군대에 비하면 숫자만 많았지 무기 상태도 극악인 상당한 약체였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소련의 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Александр Василевский)는 스탈린그라드 후방 지구에 주둔한 루마니아 우익의 4군과 좌익의 3군이 독일군보다 약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천왕성 작전(Операция Уран)을 입안했다. 

 

소련군은 루마니아 군을 압도적인 전력으로 박살내고 독일군 6군을 포위해 분쇄해 버렸다. 이와 같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포위망인 천왕성 작전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군대가 바로 루마니아 군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루마니아 군은 스탈린그라드부터 물러나더니 히틀러의 전선 사수 요청을 거부하고 더 이상의 군대를 출정시키지 않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를 지켜보며 이대로라면 나라가 패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국왕 미하이 1세는 "합법적 평화"를 원한다고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루마니아 외무부 장관 미하이 안토네스쿠(Mihai Antonescu, 1907~1946)는 영국, 미국과의 강화를 위해 접촉을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이와 같은 강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소련의 폭격이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의 유전 지대와 콘스탄차의 해군 기지에 집중되면서 전쟁은 지속되었다. 

 

1944년이 되자 소련군은 매우 빠른 진격으로 전쟁에서 철수하거나 아니면 소련에게 점령을 당하게 되는 상황의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결국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8월 20일 소련군이 1940년 6월 이전의 국경선을 넘어서 진격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다급해진 미하이 1세는 8월 23일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친(親) 추축국 세력을 숙청했다. 


이어 미하이 1세는 나치 독일에 대한 단교를 선언했다. 이온 안토네스쿠 또한 궁정쿠데타 당시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소련 정보기관이 루마니아에 잠입해 측근 세력들과 함께 안토네스쿠를 체포했다. 그러나 이러한 루마니아의 노선 변경과 관계 없이 소련군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며칠 뒤에는 부쿠레슈티가 함락되고 문테니아와 트란실바니아 지방으로 퇴각하는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루마니아는 전쟁 피해 보상금으로 3억 달러를 지불해야 했으며, 독일군에 대항하는 전투에 동참해야 한다는 조건과 10만 명의 루마니아 노동자를 소련으로 파견하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다. 다만 그로 인해 전후 별도의 보복 조치를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안토네스쿠는 전쟁이 끝나자 소련으로 보내졌으며, 유대인을 학살한 죄, 독일에 협력한 죄로 1946년 6월 1일 총살형에 처해진다. 여기에 당시의 군사재판을 본 존 래프랜드(John Laughland)는 <나는 죄 없이 죽는다>의 책에서 안토네스쿠가 독일에 협력한 죄까지 포함되어 기소되었었다고 한다. 안토네스쿠 본인은 총살형을 요청했다. 이는 아마도 루마니아의 총리이자 독재자이기 이전에 군인이었기 때문에 교수형보다 총살형을 희망했던 것 같다.


한편 루마니아는 대외 노선의 전환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1944년에 급진 좌파인 민족 농민당, 자유당, 사회민주당, 공산당이 '국민 민주 블록(Blocul Democrației Poporului)'을 결성했다. 그 위에 국왕 미하이 1세와 그의 측근인 군의 수뇌부가 이 블록에 접근하였고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근위대 사단장 니콜라에 서너테스쿠(Nicolae Sănătescu) 장군은 국민 민주 블록의 4당을 포함해서 내각을 조직하였으며, 9월 12일에 소련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대독 참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곧 정치적 변혁을 회복하려고 하는 민족 농민당의 지도자와 소련군의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는 공산당과의 대립이 발생한다. 10월에 공산당은 사회민주당 농민전선, 애국자 동맹, 노동 조합 등을 모집하여 국민 민주 전선(Frontul Democrat Popular)을 결성했다. 12월에 성립한 친(親) 서방파의 미하이 러데스쿠(Mihai Rădescu)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은 우파 신문의 발간 금지와 내무성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1945년 2월에 격심한 정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마침내 소련은 안드레이 비신스키(Андрей Вышинский, 1883~1954) 외무 차관을 보내어 미하이 1세에게 미하이 러데스쿠 장군의 해임을 요구했다. 


더불어 3월 6일에는 농민 전선의 페트루 그로자(Petru Groza)를 총리로 하는 인민 민주 전선 중심의 새로운 내각이 탄생했다. 이와 같은 소련의 루마니아 내정 간섭에 영국과 미국의 강력한 항의가 이어졌고 국제적 비판이 전개되었다. 한편 국왕과 우파 정당은 페트루 그로자 내각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당시 미하이 1세는 페트루 그로자와 농민 전선을 소련의 지시를 받는 행동대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에 이들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에서 국제적인 타협이 성립되었고 민족 농민당과 자유당에서 각각 1명을 그로자 정권에 가입시키게 하여 정권의 중성화를 이끌어 낸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출처: (주)브레이크뉴스(https://www.bre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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