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와 몰도바, "베사라비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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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4/05/16 [07:55]
▲ 정길선 박사 ©브레이크뉴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인민궁전으로 가는 통일대로 주변의 건물 벽면들을 보면 가끔 스프레이로 뿌려진 그레피티에 Besarabia e Romania!라는 구호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뜻은 “베사라비아는 루마니아다!"라는 내용인데 이 글귀를 눈여겨보면 루마니아의 곳곳에서 같은 표어를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그레피티 표어는 루마니아 뿐이 아니다. 몰도바의 수도인 키시네프에서도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표어 글귀의 다른 점은 루마니아에서와 다르게 훼손당한 사례가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것이다. 단어 중간에 “nu”를 삽입하면 “베사라비아는 루마니아가 아니다!(Besarabia nu e Romania!)”라는 뜻이 되는데 대개는 그런 식으로 훼손되어 있다. 그와 같이 훼손하는 자들의 정체는 아마 친러 세력이거나 트란스니스트리아, 가가우지아 자치 공화국 지역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친러계 사람들이고 국가로는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베사라비아(Besarabia)는 몰도바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드네스트르 강 서안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루마니아는 이 베사라비아 지역을 수복해야 할 옛 고토로 생각하고 있다. 인종적으로 같은데다가 같은 루마니아계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거나 그 반대이기 때문에 독립해야 했던 것도 아닌게 유럽의 실상이다. 복잡한 국가 간의 관계와 영토를 둘러싼 유럽의 오랜 분쟁사 중 한 무대이기도 한 베사라비아는 15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봉신국으로 오랜 지배를 받아오다 1812년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할양되었다. 이후 100년 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도중에 등장한 몰도바 민주 공화국이 1918년 대(大) 루마니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지만 적백내전으로 분주한 상황임에도 러시아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후일 탄생한 소련은 드네스트르 강 서안에 몰도바 소비에트 자치공화국(ASR)이 세워질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베사라비아에 대한 영유권을 그대로 유지했다.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루마니아에 대한 최후 통첩으로 소련군의 평화적 베사라비아 진주를 가능하게 했다.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이 탄생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루마니아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전쟁 중 루마니아가 나치 편에 서서 추축국의 일원이 된 이유 중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 소련의 각 공화국에 대한 영향력은 이미 고르바초프의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그와 반비례하여 민족주의적 성향은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몰도바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세를 띤 국가의 대표적인 경우였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에 소수 민족의 축출을 주장하는 몰도바 인민전선(PFM)과 같은 민족주의 정치세력들이 등장했고, 1989년 몰도바 소비에트 최고회의가 몰도바어와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1990년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몰도바 인민전선이 승리하면서 소수 민족들의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되었고 가장 먼저 이에 반발한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등 슬라브계 인구가 다수인 드네스트르 강 동안의 트란스니스트리아였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9월 2일 독자적인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게 된다.
뒤이어 터키계 주민들이 다수인 남부의 가가우지아 지역이 1991년 8월 독립을 선언했다. 두 지역의 독립 선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루마니아와의 통일과 소수 민족의 축출과 같은 과격한 인종주의적 태도를 취했었던 인민 전선의 등장 때문이었다. 인민 전선이 주도하는 가운데 몰도바는 가가우지아보다 일주일 늦게 독립을 선언했지만 이미 무력 분쟁이 촉발된 직후였다. 1990년 11월에는 키시네프 인근 두바사리의 드네스트르 강을 가로지른 다리에서 몰도바 측이 무력 진입을 시도하면서 민간인 3명이 사망하는 드네스트르 충돌 사건이 발생했다. 1991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간헐적으로 발생하면서 드네스트르 강 지역은 다뉴브 지역의 최대 화약고로 떠오르게 된다. 이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이 발생했는데 1992년 3월 2일 몰도바가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선제 공격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경계인 드네스트르 강을 따라 치열하게 전개된 전쟁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군사적으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는 소련 시절부터 주둔하고 있던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들로 구성된 14군이 음성적인 지원에 나섰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군수물자 지원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루마니아 역시 몰도바에 대한 군사적 지원에 나서게 된다. 1991년 7월 21일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사한 1,000여 명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민간인이었다. 양쪽 모두 정규군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경찰과 민병대, 자원병을 동원한 결과였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분쟁이 일어날 역사적 연원이야 여러 원인들이 존재하지만, 독립을 전후해 인종 갈등을 부추기고 급기야 전쟁까지 벌인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세력은 전쟁 이후 상당수의 시민들에게 정치적 신뢰를 얻지 못했다. 정권을 장악한 후 서둘러 도입한 시장 경제는 가파른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게 되었고 몰도바는 지독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1994년 독립 이후 치른 첫 총선에서는 민주농민당이 승리해 다수당이 되었고 정책의 변화가 이어졌다. 루마니아와의 통일 정책은 폐기되었고 헌법 개정과 특별법 제정으로 인해 마침내 가가우지아 지역은 자치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는 지속적으로 악화된 상태였고 부정부패의 만연과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복지의 붕괴 등으로 소련 해체와 독립 이후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들에 대한 불만 또한 깊어졌다. 2001년 총선에서는 공산당이 압도적인 다수당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몰도바 공산당은 유럽에서 최초로 자유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산당으로 기록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긴장도 완화되면서 몰도바의 정치 체계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2005년 선거에서 다시 집권했고 2009년 선거에서도 1당이었지만 지도부에 속했던 마리안 루푸의 탈당과 민주당 입당, 3개 소수당의 연합과 연립 정부의 구성 등으로 인해 권력을 잃었다. 몰도바에서 이루어진 2011년의 여론조사는 29%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지지하고 61%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말 루마니아에서의 여론조사 결과는 좀 다르게 나타났으며 44%가 찬성했고 28%가 반대했다.
소련 시기 50년 동안 여러 민족이 한 국가 안에 살았기에 민족 분쟁과 같은 정치적 사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몰도바의 독립 전후 혼란기에 전쟁까지 치러야 했던 것은 신흥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부추긴 결과였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 민족주의가 정치화 된 세력은 몰락했고 CIS 국가 중 가장 먼저 공산당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와 같은 전쟁의 쓰라림은 여전히 남아 드네스트르 강 양편을 가르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출처: 브레이크뉴스(https://www.bre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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