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헌재는 왜 ‘대선 무효’ 선언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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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명김회권 기자
지난 11월 루마니아 대선 1차 투표에서 깜짝 1위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던 극우 성향의 무소속 후보 컬린 제오르제스쿠가 12월 8일 루마니아 모고소아이아에서 헌법재판소의 대선 결과 무효화 판결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12월 6일 루마니아 헌법재판소가 11월 24일 치러진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 1차 투표를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 때문에 12월 8일 열릴 결선투표는 무산됐고 1900만명 유권자의 표는 증발해버렸다. 이번 헌재의 결정을 두고 찬반이 격렬하게 대치하는 건 예상된 결과다. 루마니아 헌재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뻔한 이런 결과를 왜 내놔야 했을까.
이 사태의 중심에는 무소속 컬린 제오르제스쿠 후보가 있다. 정치인으로서는 무명이던 그는 11월 초만 해도 1~5% 남짓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열린 대선 1차 투표에서는 22.9%의 지지율을 기록해
1위를 차지하며 이변을 일으킨다. 제오르제스쿠는 무소속인 탓에 선거 자금이 부족했고 대신 틱톡 등을 활용해 효율적인 선거운동을 펼쳤다며 승리의 이유로 ‘소셜미디어(SNS) 캠페인’을 지목했다. 실제로 그의 틱톡 팔로어는 50만명이 넘는다.
1위를 기록한 그에게 남은 건 이제 결선투표뿐이었다. 상대는 19.17%를 득표한 야당 루마니아 구국연합(USR)의 엘레나 라스코니 대표였다. 두 사람을 대상으로 놓고 벌인 여론조사에서는 라스코니가 살짝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급반전됐다. 클라우스 요하니스 루마니아 대통령이 국가방위최고위원회의 정보문서를 기밀 해제하면서부터다. 이 문서에 따르면 2016년 만들어진 틱톡의 해외 계정 약 800여개가 11월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활성화되었고 일제히 제오르제스쿠 후보를 지원하고 나섰다. 11월 24일의 1차 투표 2주 전에는 약 2만5000개의 틱톡 계정이 활성화됐고 이 역시 제오르제스쿠를 밀었다. 루마니아 선거법에 따르면 틱톡에서 후보를 홍보할 경우 ‘선거 관련 콘텐츠’라는 걸 명시해야 하는데 이 계정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명백한 선거법 위반이다.
“전통 미디어 접촉과 무엇이 다른가”
루마니아 정보 당국은 이 틱톡 작업에 ‘러시아’가 개입했다고 판단했다. 제오르제스쿠가 짧은 시간 안에 인기가 치솟은 것을 두고 “조직적이고 게릴라적인 소셜미디어 캠페인이 있었고 알고리즘이 악용됐다”고 분석했다. 제오르제스쿠는 이런 틱톡 계정들이 자율적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계정이라고 했지만 정보 당국의 판단은 달랐다. 한 계정은 제오르제스쿠의 선거운동을 위해 지불한 금액이 약 38만달러에 달했다. 약 100여명의 인플루언서들이 제오르제스쿠의 영상을 올리고 돈을 받았다.
제오르제스쿠는 틱톡과 관련해 선거비를 지출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틱톡 팔로어 50여만명 역시 돈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요하니스 대통령은 선거 결과의 수상함을 바탕으로 이 정보를 공개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여러 건의 선거 무효 소송이 헌재로 들어갔다. 헌재는 이를 검토해 선거 무효라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제오르제스쿠는 대학 교수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 일한 적은 있지만 어느 정당에도 소속돼 있지 않은, 말 그대로 군소후보 중 한 명이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애국자’라고 평가했고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루마니아의 지원도 바로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우리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모든 지원을 멈춰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루마니아가 유럽연합(EU)과 나토에서 벗어나는 걸 원하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대신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역할은 끝내야 한다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가 1차 투표에서 1위에 올랐을 때 이렇게 평가했다. “기존 정치에 대한 불만을 일깨우며 극우 성향으로 표심을 모은 점이 도널드 트럼프와 닮았다.” 반면 루마니아에서는 트럼프보다는 푸틴과 더 유사한 이미지라는 평가가 많다. 그는 자신이 승마나 무술에 능하다는 걸 영상으로 찍고 틱톡에 올리곤 했다. 그가 올린 콘텐츠 중에는 백마를 타고 달리는 모습이 있는데 푸틴이 말 타고 달리는 모습과 구도가 흡사하다. 그는 음모론자기도 하다. 인류가 달에 착륙한 적이 없다고 했고 코로나19 팬데믹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번 선거 무효를 두고 평가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해외의 선거 개입이 먹혔다는 부분이다. 루마니아는 나토(NATO)의 핵심 회원국이자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의 진출을 막아서는 동유럽 국가들 중 하나로 전략적 중요성이 크다. 지난 5월 나토는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활동이 격화했다”며 이례적으로 경고성 성명을 내놓은 적이 있다. ‘하이브리드 활동’은 정규전 및 비정규전에 사이버·인프라 공격들을 섞은 형태를 뜻한다. 루마니아 헌재는 이번 투표 과정에서의 러시아 개입을 하이브리드 활동에 따른 침공으로 봤고 대선 결과를 무효화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폴리티코 유럽판은 그의 선거 캠페인 방식을 두고 “과거 러시아가 몰도바와 우크라이나에서 사용한 전략과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갈래는 기술이 선거에 개입하는 것에 관한 판단이다. 이번 루마니아 대선은 소셜미디어의 위력, 기술 플랫폼의 취약성, 그리고 이것이 민주주의의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됐다. 반면 이런 의문도 들 수 있다. 미국 싱크탱크 대서양위원회의 마크 스콧 민주주의 기술 이니셔티브 연구원은 이번 루마니아 사태가 이전의 비슷한 사태와 무엇이 다른지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정 선거에서 소셜미디어가 유권자들의 선택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는지 여부는 불분명할 수 있다. 틱톡과 같은 디지털 플랫폼에 접속하는 건 전통 미디어를 보거나, 친구 혹은 가족과의 토론처럼 넓게 볼 때 비슷한 부분일 수 있다.” 이번의 경우 제오르제스쿠의 선거운동이 여러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불투명한 방법으로 홍보됐다는 증거가 있었지만 합법적인 방식도 일부 존재했다. 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의외의 선거 결과를 받아들게 됐을 경우, 그 사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간 합의된 방식이 없었다.
사법리스크 껴안은 1위 후보
당장 헌재의 판결을 두고 루마니아도 둘로 갈렸다. 결선투표가 없던 일이 되자 2위로 진출한 라스코니는 “루마니아의 민주주의가 짓밟혔다”며 헌재의 결정을 비판했다. 반면 결선에 오르지 못한 다른 후보들은 헌재의 결정을 환영하며 라스코니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제오르제스쿠의 지지자들은 극렬하게 반발한다. 제오르제스쿠는 헌재의 판결을 두고 “이건 쿠데타”라고 규정했다. 그의 한 지지자는 BBC에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부당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정치계의 거짓된 모습을 지금 보고 있다”고 말했다.
선거는 무효화됐고 다음 선거는 3~4개월 뒤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애초 물러나야 했던 요하니스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하기로 했다. 1위였던 제오르제스쿠는 다시 출마할 수 있지만 이번 틱톡 개입설로 형사 소송의 피의자가 될 수 있다. 사법리스크를 껴안은 셈이다. 그 사이 그의 지지자들은 거리로 나서며 선거 무효화에 반대하고 있다. EU는 틱톡 측에 “이번 루마니아 대선에 관련한 모든 데이터를 동결하라”고 요구했다. 기술과 개입,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어려운 주제가 루마니아를 관통했지만 이는 선거를 앞둔 모든 나라가 껴안은 숙제나 다름없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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